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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나·잭슨홍, '라마 라마 딩 동(Rama Lama Ding Dong)'(아뜰리에 에르메스, 2009.3.21–5.12) 전시 리뷰
[아트 인 컬처] 5월호 ----- '라마 라마 딩 동'은 박미나와 잭슨홍이 처음 협업한 전시지만, 두 작가에게 '협업'은 그리 낯설지 않다. 박미나는 Sasa[44]와 함께 여러 차례 전시를 열었다. 잭슨홍은 전직 산업디자이너로서, 협업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 테다. 어떤 물건이건 현대사회에서 개인이 구상과 디자인, 실현을 도맡기는 무척 어렵다. 이는 예술에서도 얼마간 마찬가지지만, 특히 박미나와 잭슨홍은 ‘작품의 유일한 창조자’로서 예술가상에서 벗어나는 작업을 해왔다. 박미나는 회화를 ‘설계’하는 디자이너처럼 행동하며 그 실현을 종종 타인에게 맡긴다. 잭슨홍은 기획자 또는 디자이너로서 제품/작품의 기능과 형태를 결정하고 제작에 필요한 지침을 마련하는 범위에 머물며, 실현은 제삼자 손에 맡긴다. 이런 생산 방식은 현대미술에서 전혀 새롭지 않지만, 여기서 그 뻔한 사실을 상기하는 이유는, ‘협업’과 그에 따르는 긴장, 충돌, 절충, 해소가 이 전시에서 주요 라이트모티프를 이루기 때문이다. 전시는 두 작가의 협업을 강조하지만, 오히려 여기서 떠올려야 하는 것은 '분업'이다. 근대 이후 재화 생산에서 주요 특징이 구상과 실현의 분리였고, 전자를 전담하는 기능인으로서 디자이너가 등장했음을, 그리고 예술은 그런 분리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영역으로서 ‘여전히’ 신화적 가치를 유지함을 고려할 때, 이 전시가 작가/디자이너와 디자이너/작가의 협업/분업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박미나와 잭슨홍은 두 주체의 신비한 통일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시는 자신들이 기꺼이 설정한 협업의 조건, 또는 ‘서로 넘지 말아야 할’ 분리선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 분리선 주변을 조심스레 서성이며 반대편을 넘보는 시선을 문득문득 드러낸다. 잭슨홍이 디자인하고 박미나가 실현한 '스플래시Splash', 그리고 박미나가 디자인하고 잭슨홍이 실현한 두 딩뱃 부조 작품에서, 그 계약이 내포한 긴장은 가시화한다. 전자는 잭슨홍의 디자인을 박미나가 캔버스에 물감으로 실현했는데, 그러면서 불가피하게 형성된 물질성은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두 자동차의 환상적 섹스를 방해한다. 박미나의 디자인을 잭슨홍이 공산품 재료와 기법으로 실현한 딩뱃 부조는, 적어도 기존 박미나 회화에 익숙한 눈에는, 마치 플라스틱 피규어 인형처럼 친숙하며 낯선, 따라서 얼마간 불편한 경험을 안겨준다. 재료 규격상 제약 때문에 생긴 ‘파팅 라인’들은 작품에 프랑켄슈타인 같은 인상을 더하는 한편, 두 작가가 이번 협업에서 설정한 분리선을, 나아가 현대적 생산 과정 곳곳에 그어진 분리선을 떠올린다. 반면, 전시 제목이기도 한 작품 '라마 라마 딩 동'은 어떤 어색함이나 균열감도 드러내지 않으면서, 천여 개 ‘입체 딩뱃’ 물체를 화려하게 작렬시킨다. 모호한 기호와 아기자지한 형상이 다양한 빛깔로 조합해 빚어내는 풍경은, 만물이 사탕으로 이루어진 어린이 꿈속 마을처럼, 다하지 못할 듯한 감각적, 지적 쾌감을 준다. 그런데 '라마 라마 딩 동'이 특히 행복해 보이는 데는, 그들이 엄밀한 뜻에서 ‘한 작품’을 놓고 협업하지 않았다는 점, 즉 협업의 이름으로 기계적 분업을 무릅쓰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는 듯하다. 잭슨홍은 ‘재료’로서 입체 딩뱃 캐릭터를 개발했고, 박미나는 그 재료를 배열해 풍경을 만들었다. 재료로서 입체 딩뱃은 특정한 배열을 전제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두 작가는 작업 과정 내내 의견을 나누고 영향을 주고받았겠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은 하나의 통일되고 유일한 산물이라기보다 두 준자율적 산물(입체 딩뱃과 그 배열)의 일시적 결합에 가깝다. ‘딩뱃’은 인쇄업계 용어로서, 예로부터 인쇄물에 흔히 쓰이는 형상을 쉽게 문자와 조합할 수 있도록 활자 형태로 제작한 물건을 가리켰다. 그런데 모든 활자가 그렇듯, 딩뱃 역시 궁극적 용도나 배열을 전제할 수도, 강요할 수도 없다. 완성된 딩뱃은 엄연한 제품/작품이지만, 그 가치는 예측할 수 없는 맥락에서, 타인이 텍스트로 배열해야 비로소 실현된다. 또한 같은 딩뱃이라도 그 가치는 무수히 다른 형태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어떤 문서 조판에도 쓸 수 없는 아크릴 조각을 '딩뱃'이라 (즉, 활자라) 부름으로써, 작가들은 '라마 라마 딩 동'이 입체 딩뱃의 여러 잠재적 실현태 가운데 하나에 불과함을 암시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라마 라마 딩 동'을 ‘텍스트’로 읽으려 부질없이 애쓰지는 말자. 여느 딩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입체 딩뱃에서도 개별 요소는 잠재적 의미로 가득하다. 누군가는 코뿔소를 들이받는 앰뷸런스에서 묘한 역설을 느낄 테고, 누군가는 인앤아웃 버거 표지에서 잭슨홍이 한때 거주했다는 캘리포니아 팰로 앨토를 떠올릴 테고, 또 누군가는 폭발 캐릭터에 적힌 ‘BOOM’을 네덜란드어로 읽고 그 형상이 나무인 줄 알 테다. 그러나 '라마 라마 딩 동'은 이야기가 아니고, 퀴즈나 암호문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작품은 입체 딩뱃을 위한 표본에 가깝고, 거기서 떠오르는 어떤 질서라도 활자 표본에 쓰이는 팬그램(“The quick brown fox…”)처럼 의미에 대한 물음 자체가 민망하게 우발적인 (그러나 기능적인!) 문자열에 불과하다. 공동 전시는, 작가들이 자신의 상상적 주체성을 상대에게 투영하는 거울 놀이로 그치기 쉽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라마 라마 딩 동' 전시의 미덕은, 두 작가가 자기 반영의 폐쇄계에 갇히지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상대를 이해해나가며 (예술) 생산의 조건을 짓궂게 탐색하고 조작,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그 과정에 내포된 위험이나 정서적 부담을 솔직히 밝힌다는 점에 있다.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메타한 층을 이루는 두 요소, 즉 전시 공간 일부를 변형해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퍽Puck'과, 한구석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라 일갈하는 오리 주둥이 빗자루는, 전시에 대한 주석으로서 자기 반영 구실도 얼마간 하지만, 또한 기왕에 ‘협업/분업’ 생산 시스템에 포섭된 여럿을 초대하는 기능도 발휘한다. 느닷없이 관객에게 얼굴을 돌림으로써 ‘두 작가의 협업 전시’에 대한 관음적 시선을 흩뜨리는 기능은, 말하자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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